"서예는 무한해 늘 부족함 느껴… ‘금초체’로 평가 더없는 영광"

[아트인] 서예 인생 50년 금초 정광주
안정직 영어 교사 접고 서예에 본격 입문 활동 ‘한길’
늘 공부하며 이론과 실기 섭렵 서예 대중화 기여 평가
미협 회장 등 다양한 활동 전개…서예전문전시관 ‘꿈'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2년 01월 11일(화) 18:37
(2022년 1월 제104호=고선주 기자)"서예가 무한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을 느끼는 거예요. 끝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죠. 서예는 단색 만으로 승부해야 하고, 그것으로 예술성을 다 보여줘야 하니까 힘든 것 아니겠어요. 서예는 다른 장르와 달리, 짧은 획 속에 다 담아야 합니다. 한 100년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예 한길을 50년 동안 걸었으면서 여전히 허기짐을 달래지 못해 아쉬워한다. 서예계에서는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열번째 개인전을 지난 12월 무등갤러리에서 성황리 열었다. 이 개인전의 주제는 ‘위위불진’(爲爲不盡)이었다.
‘위위불진’은 해도 해도 예술은 다함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칠순이 돼서야 알게 됐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 개인전은 70년의 삶과 50년째를 맞은 서예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때마침 총 386쪽 분량으로 국내 서예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집도 발간한 터였다. 앞서 밝힌 소감에서 느낄 수 있듯 오로지 삶의 처음과 끝이 서예만 있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인공은 금초 정광주(70·前 광주미술협회장)씨. 이런 그를 만나 서예 인생 전반을 들어봤다.
그가 서예가로 명패를 내걸기 전 학교 영어교사였다면 의외의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그는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한 뒤 서강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을 것 같던 그가 서예로 방향을 틀게 된 데는 그냥 호기 어리게 옮긴 발걸음이 아니었다. 정신 속에서는 늘 서예가 자리를 잡았다. 교사는 현실 속의 직업이었던 셈이다. 언젠가는 뒤집어질 판이 아니었나 싶다.
사범대학에 다니면서 대학 내 부재했던 서예 동아리를 결성한 장본인이 그다. 1974년 조선대 개교 이후 최초로 ‘묵연회’를 출범시켜 초대회장직을 수행했다. 묵연회에서 함
께 한 서예가로는 홍동의 강덕원 이준형 등이 있다. 묵연회 활동은 이미 대학부터 그의 삶의 추가 서예로 기울어질 예언을 암시한 근거로 이해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6년 목은 오견규와 일속 오명섭 등과 함께 광주청년작가회인 ‘백제원’을 결성, 활동을 펼쳤고, 1980년에는 전명옥 손호근 김영삼 박태후
구지회 등이 회원이었던 ‘남도청년서단’의 초대회장을 맡아 활동을 펼쳤다. ‘남도청년서단’은 광주 서예 및 문인화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까지를 그는 자신의 서예 활동 제1기(1972∼1982)로 꼽았다. 그는 군 입대한 1979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면 단 한차례도 서예와 격리된 삶을 살지 않았다. 다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드는 생각이었겠지만, 천상 서예가로서의 운명을 순순히 따른 것이기에 당시 누구나 선망의 직종 중 하나였던 교직을 과감히 떠나오지 않았나 하는 인상이 들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까까머리 소년 미술지망생과 조우할 수 있겠다. 그는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미술에의 열망이 컸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열망을 잠재우고 영어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잠시일 뿐이었다. 강제적인 면만 생각하고 눌러놓은 열망은 풍
선처럼 부풀어 올라 언젠가는 터지게 돼 있는 것처럼 그도 빵 하고 터져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교직에 있을 때부터 영어교사와 서예를 넘나들었다. 광주에 딱 두곳만 있던 서예원 중 송곡 안규동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예공부에 돌입했다. 송곡은 지금은 다 고인이 된 학정 이돈흥과 운암 조용민 등을 길러낸 장본인이다.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가면서 ‘금초서예원’을 1983년 충장로에 개원했다.
30대 초반인데도 제자가 한때 300명을 넘었으나 늘 그렇게 호황을 맞을 수는 없는 법. 그도 어려움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서예원 월세를 내지 못할 정도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교직에 있던 부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가며 버팅기는 등 생활이 보장되지 않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부모님은 어렵게 교직에 진출했는데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자 몹시 섭섭해 했어요. 고생을 굉장히 많이 해서 부임한 것을 아니까 그러셨죠. 거기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아들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다행히 교직을 떠나와 서예에 몰입한 결과 1984년 삼양백화점 내 아카데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됐다. 전서와 예서를 많이 구사한 작품들을 출품했는데 이 전시를 계기로 두각을 보이는 동시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돼 교육계에서 서예계로 옮겨온 그의 안착이 옳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러다 금초가 서예계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는 전환점이 마련된다. 198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서예 부문 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지역작가에서 전국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면서 그의 서예 인생이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그의 작가적 역량이나 작품 경향, 그리고 인맥 확장 등 모든 게 폭넓게 되면서 그의 입지는 탄탄하게 다져졌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1988년 스승이었던 송곡 안규동 선생이 별세한다.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아 송곡의 서예인생을 정립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가 주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서예인생 제2기에 속한다는 설명이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에는 완판이라는 기록이 그리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0년 남도예술회관에서 진행된 제2회 개인전 때 출품작 80여점 전체를 모두 판매하는 완판 기록을 세운다. 아마 국전 대상 수상작가라는 명성이 끼친 영향인 듯했다. 이와 함께 동아일보 동아미술제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그의 전국적 명성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다져졌다. 서예 밖 일이지만 로터리 활동을 통해 한편으로는 봉사의 개념을 정립했다. 이제 서서히 자신이 자리를 잡아가자 미술계로 눈길을 돌린다. 학정 이돈흥 회장(광주미술협회) 시절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미술인들의 가교 역할을 십분 잘 수행하는 한편, 알뜰하게 운영한 결과 협회 정상화에 일조를 했다.
"이때 서예가 미술 변방에 있었는데 위상을 높이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이게 나중에 제가 제8대 광주미술협회장이 된 동력이 됐다고 볼 수 있어요. 또 1995년이 ‘미술의 해’ 였는데 광주미술협회 30년사를 펴내 의미를 살렸죠. 그 이후 미술협회 부회장을 연속 2회 역임하는 진기록도 세웠죠.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들었어요."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던 그는 1997년 5·18민중항
쟁 추모탑 제호(휘호)와 김준태 시인의 시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그리고 유영봉안소 글씨를 새겼다. 계속해서 보폭을 넓혀오던 그는 1999년 전국 220개교 681명이 참여한 ‘광주·전남학생서예한마당’을 금초서예원 주최로 구동실내체육관에서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03년에는 5·18휘호대회를 5·18부상자회와 함께 5·18민주묘역에서 성황리 열었으며 2004년에는 서실 회원을 중심으로 해외연수(중국)를 처음 갖기 시작, 5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매주 토요일 서실에서 연 40회 서법이론 공부를 지속했다. 서예 초보자들을 위해서는 2007년 ‘서가일우’(이화문화출판사 刊)를 펴내 또 한번 서예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8년에는 북경 798예술특구에서 광주정예작가 20명이 출품한 전시를 열고 견학을 실시해 서예인들의 안목을 넓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비교적 근래인 2016년에는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359점을 출품한 가운데 현대인들의 좌우명 등 좌표를 제시한 ‘채근담’전을 성황리 열었다.
일반인들의 서예 관심을 진작시키기 위해 많이 읽히는 문구들을 서예로 옮겨 한 전시였다. 전서와 행서, 해서 등 문체를 정립하고 체계화시키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게 됐다. 그는 1989년부터 서예 인생 제3기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시기별 경향에 대해 정리, 들려줬다.
제1기는 공부 초창기로 옛날에 커리큘럼도 없고 하니까 그냥 기본대로, 취미대로 글을 쓴 시기로 설명했고, 제2기 때는 한국서법이론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아카데미를 열자 체계적 공부를 위해 1년 내내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서울을 오가며 강행군을 펼쳤다. 낙관이나 전각에 대해 더 깊이있게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시기였다. 학술적정립이 이뤄지던 시기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제3기는 외연 확대기로, 국전 대상을 수상한 이후 중압감과 책임감이 들기 시작해 날마다 밤 11시까지 공부를 해 극복을 시도했다. 그러느라 자녀들을 건사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남이 쓰지 않는 예술작품이 무엇일까를 고민 많이 했어요. 시대성과 감각, 예술성이 가미돼야 한다는 고뇌를 계속 거듭한 것이죠. 예술적 서예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이야깁니다. 서체 중 가장 묵은 맛과 본질적 맛이 나는 전서를 고민하며 다시 쓰게 됐다고 보면 됩니다."
서예인생 50년을 맞은 그는 자신의 글씨에 대해 연도별로 세세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그의 서예 세계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후세들이 ‘금초체’를 명명해주는 영광이 있었으면 하고, 서예전문 전시관도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그는 독창적 글씨체를 위한 생각이 많은 서예인이다. 지금까지 의욕적으로 달려온 서예 인생이지만 그는 여전히 할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쉼표를 찍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찍고 싶은 방점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50년 서예 한길을 달려온 만큼 훗날 ‘금초체’라 평해주면 더없는 영광이겠죠. 이번에 서집을 출간한 이면에도 제 서예에 대해 사람들이 좀더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추진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서예가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구요. 앞으로도 서예로 공헌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해나갈 겁니다.
아울러 특이한 벼루와 문방사우, 연적 등 각종 서예도구와 작품, 아카이브 자료 등을 다수 확보해 모아둔 만큼 추후 ‘서예전문전시관’ 구축이 이뤄졌으면 하는 게 제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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