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병 충의정신 기려 [문화재 다시보기]장성 오산창의사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23년 05월 10일(수)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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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오산창의사(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장성현 남문(현 북일면 오산리)에 의병청을 세우고 의병장 김경수를 중심으로 의병과 군량을 모집해 세 차례나 의병활동을 펼쳤던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사우이다.
입구의 문은 굳게 닫혀져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고, 창의사 앞 공간은 지난 가을에 쌓인 은행잎들이 탈색된 채 여전히 두껍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먼지와 낙엽으로 뒤덮인 비각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비각 안에 설치된 창의비에는 당시 의병활동에 나섰던 선비·관군·승려뿐 아니라 노비까지 총 72명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당시에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귀천이 따로 없다는, 사민평등의 이상을 실현한 신성한 장소로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장성 남문에서는 모두 3차에 걸쳐 의병이 일어났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해 7월20일 장성의 김경수는 사촌 동생인 김신남과 두 아들 김극후·김극순 그리고 기효간, 윤진 등과 함께 도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성을 비롯 고창·무장·영광·순창 등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모여 들었고, 한 달 후 김경수는 장성현의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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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3개월간 의병과 양곡을 더 모집해 드디어 1592년 11월24일 순창현감 김재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경수를 맹주로 삼아 출전했다. 12월19일 직산과 이듬해 1월10일 용인에서 왜군을 대파한 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자 해산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김경수는 다시 1593년 5월29일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양곡을 모집했다. 이 때 장성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용맹한 병사 40명을 선발해 의병을 훈련시키는 등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현감의 지원 속에 의병 836명, 양곡 629석을 확보한 김경수는 진주성의 결전이 임박하자 6월 두 아들 극후와 극순으로 하여금 의병대를 이끌고 진주성에 보내어 전투에 참여하게 했다. 이들은 진주성에서 10만명에 가까운 일본군의 총공세에 혈전을 벌이다 모두 순절했고, 진주성은 결국 함락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경수는 8월에 다시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백양사 소속 승병 77명 등 1천여 명의 의병이 모이자 김경수의 사촌 동생인 김신남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김신남은 의병을 이끌고 8월25일 안성으로 진군해 소사·안성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으나 의병의 피해도 커 퇴각해야 했다.
이같은 장성 남문창의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근세로 이어져 장성을 한말 호남의병의 진원지가 되게 했다.
오산창의사는 지역 의사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1802년(순조 2)에 호남의 유림들이 건립한 것이다.

2026.10.24 (토) 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