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칼럼] 무등로에서
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3년 06월 27일(화) 18:26
1987년 6월, 중학생이었던 필자의 학교는 대학가에 위치해 있었다. 5월 즈음부터 계속된 대학생들의 데모로 인해 매일 최루가스를 마시며 등교했다. 난생처음 맛보는 독한 최루가스에 눈도 제대로 뜨질 못했다. 눈가에 치약을 바르면 좀 낫다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가 더욱 강렬한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다.
어떤 날엔 학교 운동장에서 대학생들과 경찰들의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교실 유리창이 부서지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 찬 교실에 유리창까지 깨졌으니 눈물 콧물로 얼굴이 범벅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모하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결코 싫거나 밉지 않았다. 비록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겪었던 일이지만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잔상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어른들이 무심코 던지던 말들이 무의식중에 ‘데모하는 대학생=의로운 사람들’이라고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인의 형님이신 혜당 스님에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해도 같은 해였다. 영어 수업 중 1980년 오월 광주와 전두환과 독재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싹튼 출발점이 됐다. 어쩌면 나중에 ‘데모하는 대학생’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게 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1987’을 최근 다시 보았다. 이 영화는 박종철, 이한열 두 젊은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으로 촉발된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 작품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오버랩 되며 보는 내내 마음이 일렁거렸다.
특히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민주 열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故 문익환 목사의 조사 영상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삽입되어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들었다. 70대 노인이 20대 청년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를 하려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26명의 열사 이름과 오월 광주의 영령들을 부르며 절규했을 뿐이지만,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장엄함으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명연설로 꼽힌다. 여기에 엔딩 크레딧과 함께 잔잔히 흐르던 노래 ‘그날이 오면’의 마지막 여운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수많은 과제를 잊지 말라고 조언하는 듯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문승현이 작사·작곡한 ‘그날이 오면’은 1985년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극 '불꽃'의 주제곡으로 탄생했다. 노랫말에 담긴 숭고한 이미지와 간결하면서도 풍성한 음악 구성으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는 노래다. 필자 역시 이 노래를 무척 사랑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노래들이 존재한다. 이런 곡들은 때때로 시대를 표상하는 문화 코드로 분석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지향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웠던 1980년대에는 ‘민중가요’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폭압적인 군부 독재에 저항하고 사회 부조리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았고, 노래를 통해 서로를 위로했다.
지금,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대전환의 시대를 논하며 시작된 미래 사회에 대한 패러다임은 위기와 기회라는 상반된 키워드를 바탕으로 셀 수없이 많은 콘텐츠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이정표를 지나며 성장해 온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현재 새로운 격동의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공정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는 여전히 존재하며 빈부의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혹자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회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모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의 가르침처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쓰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다.’ 영화 ‘1987’의 포스터에 새겨진 이 한 줄의 문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6월이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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